굶기 싫어서 돈을 모으기 시작한 사람이 있습니다. 통장 숫자가 오르는 것을 보면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면 돈이 있는데도 라면만 먹고 있습니다. 돈이라는 수단이 밥이라는 목적보다 앞에 선 것입니다.
제조 현장을 수십 곳 다니면서 이 장면을 정말 많이 봤습니다. 관리하려고 들인 시스템이 어느새 목적을 잠식해 버린 경우입니다. 이 글은 그 잠식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되돌리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결론부터: 숫자가 늘수록 목적이 사라진다
시스템은 목적 하나 때문에 들입니다. 그런데 화면에 숫자가 하나 늘 때마다 회사가 관리되는 느낌이 들고, 그 느낌 때문에 숫자를 더 넣게 됩니다. 사무실 화면의 숫자 하나는 현장이 찍어야 할 절차 하나입니다. 얻는 것은 처음 그 목적 하나 그대로인데 현장이 하는 일은 몇 배가 되고, 어느새 처음 목적은 화면 어디에도 남지 않습니다.
수단이 목적을 잠식한다는 것은, 목적을 이루려고 만든 수단이 자라면서 그 수단을 유지하는 일 자체가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스템은 있는데 아무도 안 쓰는 공장
저희에게 오는 전화는 대개 이렇습니다. "시스템이 있는데 아무도 안 써요. 한번 봐주세요." 가서 보면 시스템은 잘 세팅되어 있습니다. 화면도 많고 숫자도 많습니다. 그런데 다들 힘들어합니다.
그럴 때 제일 먼저 묻는 것은 하나입니다. "이거 왜 만드셨어요?" 답은 거의 한 문장입니다. "지금 이 주문이 어디까지 갔는지 알고 싶었다." 고객이 물어보면 바로 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인데, 그 시스템에는 화면이 수십 개입니다.
어떻게 화면 하나가 수십 개가 되는가
만드는 동안 이야기가 자라기 때문입니다. 주문이 어디까지 갔는지 알려면 공정마다 실적을 찍어야 합니다. 그러면 찍는 김에 요청이 붙습니다.
- 생산: 누가 했는지, 어느 설비로 했는지도 넣자
- 품질: 불량 수량과 사유도 같이 넣어 달라
- 자재: 무엇을 얼마나 썼는지도 찍자
- 경영진: 이것을 원가까지 이어서 보고 싶다
하나하나 다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 들어올 때마다 화면에 숫자가 하나 늡니다. 그 숫자를 보면 회사가 관리되는 느낌이 듭니다. 전에는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래 화면처럼, 열이 하나 늘 때마다 마음이 놓이고 그래서 더 넣게 됩니다.

사무실 화면의 숫자 하나가 현장의 절차 하나
숫자는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누군가 어디선가 찍어야 생깁니다. 처음에는 공정이 끝났을 때 한 번 찍으면 됐습니다. 그런데 항목이 하나 붙을 때마다 현장이 찍는 자리가 하나씩 늘어납니다.
- 작업자 항목을 넣으니 시작할 때 사람을 골라야 한다
- 설비 항목을 넣으니 어느 설비로 돌렸는지 골라야 한다
- 자재 항목을 넣으니 투입할 때 수량을 적어야 한다
- 불량 사유를 넣으니 불량이 날 때마다 화면을 열어야 한다
- 원가를 뽑으려니 몇 시에 시작해서 몇 시에 끝났는지까지 찍어야 한다
한 번 찍던 자리가 넷이 되고 다섯이 됩니다. 찍는 자리마다 화면이 하나씩 붙습니다. 이것이 편 전체를 지탱하는 등식입니다. 사무실에서 보는 숫자 하나가 현장에서는 절차 하나입니다.

목적은 여전히 그 하나인데 현장이 하는 일은 몇 배가 됩니다.
잠식이 완성되는 순간
회의에서 보는 것이 바뀝니다. 주문이 어디까지 갔느냐가 아니라 숫자가 다 채워졌느냐를 봅니다. 채워진 칸이 많으면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장의 일은 물건을 만드는 것에서 숫자를 채우는 것으로 옮겨 갑니다.
그 사이에 목적은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이 주문이 지금 어디까지 갔는지 막상 물어보면, 화면 몇 군데를 열어서 맞춰 봐야 답이 나옵니다. 숫자는 가득한데 답은 멀어졌습니다.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일이 된 것입니다. 시스템이 목적을 가려 버렸습니다.
누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요청한 사람들은 다 맞는 말을 했습니다. 저희 같은 개발업체도 시킨 것을 다 만드는 것이 일입니다. 다만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목적에 비춰 볼 자리에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 이 숫자가 목적에 필요한가
- 이 숫자 때문에 현장에 절차가 몇 개 늘어나는가
이 절충을 해 주는 업체가 거의 없습니다. 업체는 그 공장의 목적을 공장만큼 알 수 없고, 공장은 숫자가 늘어날 때 현장에 무엇이 같이 늘어나는지 미리 볼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서 목적이 빠져나갑니다.
되돌리는 방법은 지우는 것
저희는 대개 이렇게 커진 뒤에 불려 갑니다. 그래서 가서 하는 일은 결국 지우는 것입니다. 만들 때 못 한 절충을 뒤에서 대신 하는 일입니다.
- 목적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적습니다. "이 주문이 지금 어디까지 갔는지 알고 싶다."
- 화면의 숫자를 하나씩 그 문장에 비춰 봅니다. 이 숫자가 목적에 필요한가.
- 아니면 지웁니다. 숫자를 지우면 현장의 절차도 같이 지워집니다.

그렇게 하면 수십 개 화면이 몇 개로 줄고, 현장이 할 일은 공정이 끝났다고 찍는 것 하나만 남습니다.
지우자고 하면 꼭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나중에 필요하면 어떡하냐." 그때 다시 얹으면 됩니다. 아무도 안 보는 숫자를 현장이 매일 찍고 있는 쪽이 훨씬 비쌉니다. 그렇게 지우고 나면 주문이 어디까지 갔는지 바로 보입니다.
오늘 해볼 것
지금 쓰는 시스템을 왜 들였는지 한 문장으로 적어 보십시오. 그리고 화면에 있는 숫자를 하나씩 그 문장에 비춰 보십시오. 그 목적에 필요 없는 숫자가 몇 개인지 세어 보면 됩니다.
지우자고 하면 다들 잠깐 망설입니다. 화면이 비어 보이고 관리되는 느낌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우고 나면 다들 같은 말을 합니다. "이제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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