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받은 작업지시서의 순서가 어제와 또 다릅니다. 어제 맨 위에 있던 일은 뒤로 밀렸고, 새로 올라온 건에는 긴급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그 아래 건도 긴급, 그 아래도 긴급입니다. 이쯤 되면 긴급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시스템을 만들러 제조 현장을 수십 곳 다니면서 이런 공장을 유난히 많이 봤습니다. 이 글은 "긴급 좀 줄여달라"는 부탁이 왜 다음 주면 되돌아오는지, 그리고 긴급을 실제로 줄이는 순서가 무엇인지 적은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공장이 전부 긴급이 되는 것은 사람 문제가 아니라 자리 문제입니다. 긴급을 붙이는 데 아무 대가가 없으니 긴급이 늘고, 하루에 긴급이 들어갈 자리가 몇 개인지 아무도 모르니 무리한 요청을 거절할 근거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탁하는 대신 자리를 정합니다.
- 지난 두 주 작업지시서에서 긴급 건수를 센다.
- 하루 순서표 맨 위에 긴급 칸을 세어 본 건수의 절반쯤으로 그린다.
- 칸이 다 찬 뒤 새 긴급이 오면, 무엇을 내일로 미룰지 요청한 사람이 고르게 한다.
- 누가 무엇을 미뤘는지 한 줄씩 남기고, 일주일에 한 번 영업 회의에서 훑는다.
긴급 좀 줄이자는 약속은 왜 한 주를 못 버티나
말로 한 약속이 못 버티는 이유는 순서를 옮길 수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제가 들어갔던 공장의 사장님도 답답해서 이미 손을 써 본 상태였습니다. 영업 회의에서 긴급 좀 줄이자고 했고, 그 주는 조용했다가 다음 주에 긴급이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그 공장은 사장님도 순서를 옮기고, 영업 담당도 옮기고, 작업자도 준비가 비슷한 일을 골라 먼저 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한 사람이 약속을 지켜도 다음 사람이 옮겨 버립니다.

해외 커뮤니티에도 똑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열네 명 규모 공장의 공장장은 "Nobody had ultimate authority … Any one person would move production without consulting anyone else. Also operators would grab jobs out of position to save on set up times for similar setups, often not paying attention to critical ship dates." 라고 적었습니다(reddit r/manufacturing). 다른 공장의 글에서는 "We were going by whoever yelled loudest on the phone that week." 라며, 밀린 주문이 90건을 넘고 주문에서 출하까지 평균 24일이었다고 했습니다(reddit r/LeanManufacturing).
제가 간 공장도 하루에 긴급을 몇 건이나 감당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니 이번 건이 무리인지 아닌지 따질 근거가 없었고, 말로 한 약속만 남았습니다.
긴급이 자꾸 늘어나는 이유
긴급이 늘어나는 것은 긴급이라고 적는 데 아무 대가가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붙이는 쪽은 일이 빨리 되는 이득만 보고, 대가는 현장이 대신 치릅니다. 고객사는 견적서만 달라고 했는데 현장에는 긴급으로 내려오는 일도 있습니다. 한 중소기업 실무자의 글이 그 장면 그대로입니다.
"긴급하다는 거 보면 / 그냥 고객사가 견적서 요청한건데 / 지가 계약 빨리따고싶어서 / 긴급이라고 구라까고 빨리하라 닥달함" — 디시인사이드 중소기업 갤러리
공짜인 것을 안 쓸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번 당겨주면 그다음이 더 심해집니다. 보냉봉투 제조 공장 대표가 쓴 글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납기를 서두르면 공장 입장에서는 유무형의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 "희한한 것은 이렇게 한두 번 도와 주다보면 꼭 그런 업체만 긴급을 입에 달고 사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 브런치, (제 7 화) 적어도 영업을 한다는 내 성격에 대하여
그래서 전부 긴급이 됩니다. 사람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대가가 없어서입니다.
부탁 대신 자리를 정하는 순서
긴급을 줄이는 첫 단계는 하루에 낄 수 있는 긴급 칸 수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 공장에서는 이렇게 했습니다.
- 지난 두 주 작업지시서를 전부 꺼내 긴급으로 들어온 건이 하루 몇 건이었는지 셉니다. 아무도 모르던 숫자가 이때 처음 나옵니다.
- 하루 일감을 순서대로 적은 표를 한 장 만들고 맨 위에 긴급 칸을 그립니다.
- 칸 수는 세어 본 건수의 절반쯤으로 잡습니다. 세어 본 만큼 그대로 두면 지금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 공장은 하루 4건이 나와 두 칸이 됐습니다.
- 나머지 줄은 순서를 고정합니다.
완성된 순서표는 아래 모양입니다. 맨 위 긴급 칸 두 개가 하루에 낄 수 있는 긴급의 전부입니다.

새 긴급이 들어오면 누가 무엇을 고르나
긴급 칸이 다 찬 뒤 새 긴급이 들어오면, 무엇을 내일로 미룰지 요청한 사람이 고릅니다. 생산관리 담당은 안 된다고 거절하지 않습니다. 순서표를 사진 찍어 요청한 사람에게 보내고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 긴급 두 칸은 이미 찼는데 어느 걸 내일로 미룰까요?"
거절이 아니라 질문으로 돌려보내는 대화의 모양입니다.

담당자는 한 줄만 적습니다.
- 무엇이 뒤로 밀렸는지
- 누가 골랐는지
- 어느 거래처 건인지
사장님이 요청해도 똑같습니다. 오히려 사장님이 먼저 칸 안에서 골라야 이 규칙이 굴러갑니다. 윗사람이 한 번 건너뛰면 규칙은 그날로 끝납니다.
쌓인 한 줄로 무엇이 보이나
한 줄씩 쌓인 기록을 일주일에 한 번 훑으면 긴급을 요청하는 상대가 한두 곳으로 좁혀집니다. 생산관리 담당이 그 목록을 영업 회의에 들고 갑니다. 누가 몇 번 미뤘고 어느 거래처 건이었는지가 목록에 다 있습니다.

- 매번 올라오는 거래처는 다음 견적부터 납기를 길게 잡습니다. 늘 급하다면 그것은 원래 납기가 짧은 것입니다.
- 우리 회사 안에서 같은 이름이 반복되면 그 일은 애초에 긴급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부탁할 상대가 아니라 조건을 바꿀 상대입니다.
그 공장은 몇 주 지나니 긴급 요청 자체가 줄었습니다. 무엇을 미룰지 직접 골라야 하니 함부로 붙이지 않게 됐습니다.
칸 밖에 둬야 하는 일과, 칸으로 안 풀리는 공장
설비가 멈춘 일과 안전에 문제가 생긴 일은 긴급 칸 밖에 둡니다. 그것은 순서를 다투는 일이 아니라 그냥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어 봤는데 답이 안 나오는 공장도 있습니다. 긴급 건을 빼고 봐도 나머지가 이미 다 늦어 있는 경우입니다. 그것은 순서 문제가 아니라 받아 놓은 양이 넘친 것이고, 순서표는 그 사실을 정확히 보여줄 뿐입니다. 그때는 자리를 나눌 것이 아니라 받는 양부터 손봐야 합니다.
오늘 할 수 있는 것
지난 두 주 작업지시서에서 긴급 건수만 세어 보십시오. 그리고 내일 순서표에 긴급 칸을 몇 개 둘지 적어 보십시오. 칸 수가 정해져야 무엇을 미룰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 디시인사이드 중소기업 갤러리 — 제조 capa 신경안쓰고 무조건 수주 따오면 구매부 생산부 다 힘들어진다
- reddit r/manufacturing — 14인 공장 공장장의 글 "Nobody had ultimate authority" (봇 차단 사이트라 링크를 걸지 않습니다)
- reddit r/LeanManufacturing — "We were going by whoever yelled loudest on the phone that week." (봇 차단 사이트라 링크를 걸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