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업체를 바꿔도 불량이 반복되는 이유

밖에서 사온 물건이 불량이라 업체를 바꿨는데, 다음 업체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원인은 업체가 아니라 발주서에 판정 기준이 빠져 있는 데 있습니다. 발주서에 한 줄을 넣고 입고 결과를 한 줄로 남기는 방법을 정리했습니다.

밖에서 사온 물건을 뜯었는데 쓸 게 없습니다. 백 개를 받아 몇 개도 못 건졌고, 그 물건은 당장 오늘 조립에 들어가야 합니다. 업체에 전화하면 담당자가 바뀌어 있습니다. 결국 업체를 바꾸는데, 다음 업체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현장을 수십 곳 다니면서 이 장면을 반복해서 봤습니다. 업체를 세 번 바꾼 회사도 결과는 같았습니다. 바뀌지 않은 것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원인은 업체가 아니라 발주서에 있다

업체를 바꿔도 불량이 반복되는 이유는 발주할 때 판정 기준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 맞춰야 통과인지 적어 보내지 않으면, 업체는 자기 기준으로 만듭니다. 그 기준은 대개 가장 싸게 만들 수 있는 기준입니다. 업체를 바꿔도 기준을 안 주는 것은 그대로이니, 받아 드는 물건도 그대로입니다.

이 지적은 해외 제조 커뮤니티에서도 같습니다. 벤더가 보낸 가공품이 형편없다는 사진 글에 댓글이 200개 넘게 붙었는데, 다수가 업체가 아니라 발주한 쪽을 지적했습니다.

"Did you spec a surface finish? Because it's entirely possible to make something that looks terrible AND is to spec, if spec isn't in line with design intent."

"You wanted cheap, here ya go!"

발주서에 실려 나가는 것은 대개 셋뿐이다

발주할 때 무엇을 보냈는지 떠올려 보면 대개 수량, 납기, 단가입니다. 그리고 "잘 좀 해주세요"가 붙습니다. 받는 쪽 입장에서 이 문서에는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문장이 없습니다.

판정 기준이 없으면 입고 검사도 같이 사라집니다. 수입검사란 외부에서 받은 물건이 정한 기준을 만족하는지 입고 시점에 확인하는 활동입니다. 만족 여부를 볼 기준이 없으면 검사할 근거도 없어서, "느낌상 나쁨"밖에 남지 않습니다. 실제로 품질 실무자들끼리 수입검사를 어떻게 하는지 서로 묻는 글이 계속 올라옵니다. 받는 쪽에 정해진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업체는 대충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선에 맞춘 것이다

업체가 성의 없이 만들었다고 보면 해결책이 "업체 교체"밖에 안 나옵니다. 맞춰야 할 선이 없으니 자기 선에 맞춘 것으로 보면 다른 해결책이 나옵니다.

아래 그림은 그 두 선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줍니다. 업체가 맞춘 선 안에서는 물건이 고르게 나오고 있습니다. 흔들려서 불량이 난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만든 위치가 우리가 생각한 위치와 다를 뿐입니다.

치수 축 위에 업체가 맞춘 선과 우리가 생각한 선이 서로 다른 위치의 구간으로 그려져 있고, 두 구간 사이의 간격을 화살표가 가리키는 도해

이 간격은 우연이 아니라 항상 생깁니다. 우리 머릿속에만 있는 선을 업체가 맞힐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발주서에 판정 문장 한 줄을 넣는다

기준을 새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대부분 이미 있습니다. 도면에 공차가 적혀 있고, 검사 기준서도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것을 업체에 보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한 번에 전부 옮기려 하면 시작을 못 합니다. 이렇게 시작하면 됩니다.

  1. 그동안 클레임이 가장 많았던 항목을 하나 고릅니다.
  2. 그 항목의 기준을 도면이나 검사 기준서에서 찾습니다.
  3. 그 한 줄을 다음 발주서에 그대로 옮겨 적습니다. "이 치수는 10.0mm부터 10.2mm까지" 같은 형태입니다.

클레임이 많았던 항목 막대 그래프에서 가장 높은 항목 하나를 골라, 발주서의 판정 기준 칸에 치수 범위 한 줄로 옮겨 적는 것을 화살표로 나타낸 도해

이 한 줄이 들어가면 업체 쪽 일이 바뀝니다. 맞춰야 할 선이 생기니 거기에 맞춰 만듭니다. 제대로 하는 업체일수록 이 한 줄을 반깁니다. 무엇을 맞춰야 하는지 알고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받을 때마다 세 가지를 한 줄로 남긴다

두 번째로 할 일은 기록입니다. 남길 것은 셋뿐입니다.

  • 업체 이름
  • 받은 날짜
  • 몇 개 중에 몇 개가 걸렸는지

공책이든 엑셀이든 상관없습니다. 형식보다 매번 남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게 왜 필요한지는 석 달만 쌓이면 드러납니다. 품질 게시판에 올라오는 하소연은 대체로 이런 형태입니다.

"장기간 생산량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불량률이 오르는게 조금씩 느껴지고있는데 이럴때 좋은 방안혹은 관리 방안이 있을까요?"

"느껴지고 있다"가 문제입니다. 오르는 것을 느끼기만 하고 수치로 대지 못하면 업체에 할 수 있는 말도 "요즘 좀 그렇던데"가 전부입니다.

월별로 쌓인 입고 불량 건수 기록이 "불량이 느는 것 같아요"라는 말을 "지난달 3번, 이번 달 5번"이라는 말로 바꾸는 것을 나타낸 도해

기록이 쌓이면 같은 말이 "지난달에 세 번, 이번 달에 다섯 번"으로 바뀝니다. 숫자로 알려주면 업체도 무엇을 고쳐야 할지 알게 됩니다. 담당자가 바뀌어도 회사에 이력이 남는 것은 덤입니다.

시스템은 그 다음 순서다

품목이 늘고 항목이 많아지면 공책으로는 감당이 안 됩니다. 그때는 시스템을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순서가 있습니다. 발주서에 무엇을 실어 보낼지, 무엇을 기록할지가 먼저 정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시스템을 들여도 담을 내용이 없습니다.

오늘 할 수 있는 것

최근에 클레임이 났던 품목을 하나 고르세요. 그 항목의 기준을 도면에서 찾아, 다음 발주서에 그대로 옮겨 적으면 됩니다. 그 한 줄이면 다음에 받는 물건부터 달라집니다.